'문화의 산길 들길/문화재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7.30 주령구(경주 안압지 출토)
  2. 2011.07.19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3. 2011.06.20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주령구(통일신라시대, 안압지 출토) - 국립경주박물관 소장(복제품)

 

주령구(酒令具)는 경주 동부 사적지대(사적 제161호)로 지정된 권역 안에 위치한 경주 동궁과 월지(기존명칭 경주 임해전지, 사적 제18호)에서 출토된 유물로,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전시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제2별관)은 19881년 6월 30일 신축한 것으로, 건축가인 고(故)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지하 2층, 지상 1층 규모의 기와지붕을 얹은 건물이다. 지하 1~2층은 출토 유물을 보관하는 창고인 수장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지상 1층은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후 1982년 7월 제2별관으로 개장했으며, 1985년 10월 안압지 상설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20여년 간 사용해 온 전시실의 낙후 등을 개선하기 위한 환경 개선 공사를 위해 2004년 5월 임시휴관에 들어가 7개월 간의 공사를 거쳐 동년 12월 28일, 내부 전시공간을 상하 두 지역으로 구분하여 확장하고, 기존보다 100여점 많은 800여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안압지에서는 기와류 5,800여 점, 토기 등 그릇류 1,750여 점, 목제류 1,1300여 점, 금속류 840여 점, 목간류 80여 점, 철기류 690여 점, 동물뼈 430여 점, 석제류 60여 점 등 총 1만 5천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이 유물들은 자칫 지금처럼 볼 수 없을 뻔 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에서 마련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발굴보다는 준설작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당시 계획에 따르면 "발굴을 겸한 준설 작업과 임해전지의 경역을 넓히기 위하여 침식된 사유지를 매입하여 나무를 심고, 건물지 초석을 전시하며 환경을 미화한다. 그리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하여 전등을 한식으로 세우고 안내판을 설치하며 주위 보호책을 설치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바로 시행되지 못하고, 1974년 11월에 들어와서야 도진건설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준설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여 있던 물을 빼내고 경주사적관리사무소 직원 입회 하에 준설 작업에 들어갔지만, 못바닥에서 쏟아져나오는 신라 유물을 직원 한 두명으로 모두 수습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예상 밖으로 연못을 축조한 호안의 석축이 새로 나타나는 등 예상치 못한 내용이 드러나자, 결국 준설 작업을 즉각 중단하고, 정식 발굴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에 종사하고 있던 경주고분발굴조사단에서 급히 조사원을 차출하여 1975년 3월 25일부터 1976년 12월 30일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도판 101) 186. E18구 목제 주사위 출토상태 - 안압지 발굴조사보고서

 

주령구는 1975년 6월 19일, 서편 호안의 E18구(區) 탐색갱의 바닥 유물층 제거중 출토되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안압지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나무로 만든 14면체의 주사위로 면의 모양은 사각형이 6개, 삼각(실제로는 육각형)이 8개이며 각면에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놀이구로 사용한 것 같다. 크기 5.5cm×4cm'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후 주령구는 1980년 11월 17일부터 12월 30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안압지 출토유물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되고, 이후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서 상설 전시되었지만 오직 복제품만이 공개되어 진열되었다. 보존상의 이유로 진품의 공개가 제한된 것이 아니라 진품이 불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출토 당시, 주령구는 경질목(참나무)에 흑칠(黑漆)을 한 상태로 오랜시간 뻘 속에 있었기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사진 촬영과 실측 등 유물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종로구 창성동에 있던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에서 즉시 보존 처리에 들어갔다.

 

나무로 만든 것이기에 한꺼번에 강한 빛으로 건조시키게 되면, 뒤틀리기에 서서히 수분을 제거시켜 원형에 아무런 손상이 없도록 처리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전기 오븐에 넣고 건조하게 했다. 자동 전기 조절이 가능하도록 하여 온도가 높아지면 전원이 끊어졌다가 낮아지면 다시 연결되도록 하여 항상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는 장치였다.

 

그런데 이 자동 전기 조절기가 말을 듣지 않아 과열되어 하룻밤 사이에 주사위를 재로 만들었고, 다행히 당직자에 의해 발견되어 화재로 번지지는 않았다. 종로경찰서에서 이에 대해 사고원인을 조사하여 자동 조절기의 작동 불능으로 전기가 과열되어 일어난 사고였음이 확인되고, 보존 처리 담당자의 책임을 묻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후 1989년 6월 14일, 지방 신문 1면에 실린 '국보급 신라 문화재 2점 소실'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이 기사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다가 언론사로 직장을 옮긴 기자가 당시 알고 있었던 이 사실을 보도한 것이었다

 

(도판 175~177) 364~378. E18구 목제 주사위(처리후 상태)와 목제 주사위 14면 문구 - 안압지 발굴조사보고서

 

진품은 소실되어 사라졌지만, 보존처리에 앞서 유물에 대한 사진과 실측 기록을 해 둔 덕분에 지금 우리가 접하는 복제품을 통해 당시 신라시대 사람들의 놀이 문화를 짐작케 할 수 있었던 점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령구는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놀이도구의 하나로, 각 면에는 주령구를 굴린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지시하는 글(벌칙)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유범공과(有犯空過, 4각면) :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2. 금성작무(禁聲作舞, 4각면) : 소리 없이 춤추기

3. 중인타비(衆人打鼻, 4각면) :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4. 삼잔일거(三盞一去, 4각면) : 술 세잔을 한 번에 마시기

5. 자창자음(自唱自飮, 4각면)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6. 음진대소(飮盡大笑, 4각면) :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7. 농면공과(弄面孔過, 6각면) : 얼굴을 간질여도 꼼짝 않기

8. 양잔즉방(兩盞則放, 6각면) : 술 두 잔이면 쏟아 버리기

9. 월경일곡(月鏡一曲, 6각면) : 월경 한 곡 부르기

10. 임의청가(任意請歌, 6각면) :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를 청하기

11. 공영시과(空詠詩過, 6각면) : 시 한 수 읊기

12. 추물막방(醜物莫放, 6각면) : 못생긴 것을 버리지 않기

13.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 6각면) : 스스로 괴래만(노래이름)을 부르기

14. 곡비즉진(曲臂則盡, 6각면) : 팔을 굽힌 채 다 마시기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동일한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그 생김새가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전체적으로 흑빛을 띄고 붉은 글씨로 쓰여져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주령구는 흑칠이 되어 있었다는 발굴조사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실물과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사진자료는 흑백 도판만이 남아있어 주령구 문구의 색상 등 자세한 내용의 확인은 안 되고 있다.

 

주령구(통일신라시대, 안압지 출토)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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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연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8, 9번지

문화재 지정현황 : 보물 제93호(1963년 1월 21일 지정)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인 용암사(龍巖寺) 대웅보전 왼쪽 산비탈에 있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은 고려시대 세워진 석불로 거대한 화강암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세겼는데, 머리 위에 돌로 된 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다.

석불의 전체 높이는 17.4m로 국내에서 가장 큰 마애불로, 원립불의 얼굴 길이는 2.45m, 방립불은 2.36m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매우 거대한 느낌이 들며, 정형화된 불상의 모습보다는 서민의 삶이 묻어져 있는 지방화된 불상이라 할 수 있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연꼴을 쥐고 있고며, 오른쪽의 네모난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두 불상이 동일하다. 구전에 따르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네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려 제13대 국왕인 선종(宣宗, 재위 1083~1094년)이 자식이 없어 셋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이를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명의 도승(道僧)이 나타나서는 "우리는 장지산 남족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배가 매우 고프니 먹을 것을 주시오"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고, 꿈에서 깬 궁주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곧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즉시 이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더니,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선종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이중 둘은 일찍 죽고 선종의 뒤를 이은 헌종(獻宗, 재위 1094~1095년)과 한산후가 있었으니, 이는 사실과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조성 시기를 유추할 수 있는 탄생설화로 남아있다.

1995년 경기도문화체육과 박홍국 학예연구관이 종래 판독 불가능했던 것으로 취급된 석불입상의 하단에 자리한 발원문을 탁본해서 판독하는 과정에서 '성화(成化)'라는 명나라 연호가 나왔으며, 이는 세조 11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세조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작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현재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지고 조선시대에 축원문을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 문화재청)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석불을 참배하고 남북통일과 후손잇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위의 사진과 같이 원립불 왼쪽 바위 위에 동자상을 세우고, 그 뒤에는 칠층석탑을 두었지만, 4·19 혁명 이후 하야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 문화재 훼손 비판이 일면서, 1987년 철거하여 요사채(종무소) 오른쪽에 세워두었다가 현재는 미륵전 옆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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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연

명 칭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칠장리 764) 칠장사 경내

문화재 지정 현황 : 보물 제488호(1968년 12월 19일 지정)

 

칠장사 원통전과 명부전 사이에 난 산길로 약 80m 가량 올라가면 나한전과 함께 비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고려시대 국사(國師)였던 혜소국사 정현(惠炤國師 鼎賢, 972~1054)의 탑비이다. 화강암과 흑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비신의 높이는 227cm, 너비 127cm이다. 고려 문종 14년(1060)에 건립되었으며, 비신 중앙부가 절단난 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75년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얹은 비각을 세우면서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 죽산 출생으로, 10세(981년)에 광교사(光敎寺)에서 충회대사(忠會大師)의 제자가 되어 출가하였으며, 17세(992년)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후 목종 2년(999) 왕명에 의해 대사가 되고, 문종 2년(1048) 가뭄이 들었을 때, 문덕전(文德殿)에서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하면서 기우(祈雨)하자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듬해(1049년) 왕사(王師)가 되었고, 문종 8년(1054) 국사(國師)가 되었으며, 그해 칠장사에서 입적했다.

비신의 상단부 제액에는 '증시혜소국사비명(贈諡慧炤國師碑銘)' 8자를 해서체로 가로 2단으로 새겨넣었으며, 하단의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김현(金顯)이 짓고, 전중승(殿中丞) 민상제(閔賞濟)가 구양순체(歐陽詢體)로 썼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비문

비신의 양쪽 옆면에는 보주(寶珠)를 사이에 두고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일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왜장인 가토(加藤淸正)가 충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던 중 죽산에 있는 칠장사에 들렸는데, 한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로 베었는데,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자 가토가 이를 보고 겁이 나서 도망쳤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헌종 15년(1674) 당시 한 세도가가 장지로 쓰기 위해 칠장사를 불태울 때 비석도 두 조각으로 깨서 버렸는데, 그가 누구인지 기록에 남는 것을 후손이 두려워해서 앞의 왜란설을 퍼뜨렸다고도 한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귀부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이수

혜소국사비의 귀부(龜趺,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비석 받침대)와 이수(螭首, 비석의 몸돌 위에 얹은 덮개돌로 이무기나 용의 모습을 새겨 넣음)는 비신 옆에 따로 분리되어 놓여져 있다. 귀부의 거북은 머리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귀갑(거북의 등딱지)은 육각의 갑문(甲文)이 뚜렷하게 남아있으며, 이수에는 구름과 용을 입체적인 부조로 조각했다.

혜소국사비 비신의 뒷면에는 여러 종류의 낙서를 세겨놓아 보기 흉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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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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